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스즈키 케이시 (문단 편집) == 기타 == [[치바 롯데 마린즈|다른 의미]]의 [[로나쌩]]. 유래는 다음과 같은데, 신인이던 1966년에 올스타전에 출전하여 같은 좌완 투수이자 대선배이던 [[가네다 마사이치]](당시 요미우리 자이언츠 소속)에게 [[커브볼]] 던지는 방법을 배울려고 하자 ‘배우고 싶으면 돈을 갖고 와라’(...)는 말을 듣고 빡쳐서(...) 적개심을 불태우게 된다. 그리고 가네다가 [[치바 롯데 마린즈|롯데 오리온스]]의 감독이 되자 그 화를 풀면서(...) 가네다가 감독으로 있던 1973년부터 1978년까지의 6시즌 동안 롯데전 통산 26승 8패의 성적을 남겼다. ~~이런 것마저 [[선동열|각동님]]을 닮았던 건가... 아니지 정확히는 각동님이 스즈키를 닮았다고 해야 할 지도~~ 간사이 사철 3개팀에서 각각 뛰었던 [[요네다 테츠야]](한큐), [[카도타 히로미츠]](난카이)와의 대담에서 아래의 일화 등을 회상했다. >- 요네다 : 한큐는 자금 지출에 소극적이었으며 계약 갱신 시 전례가 없다, 전례를 깰 것이냐라며 선수들과 항상 싸웠다. >- 스즈키 : 간사이 3개 구단 중 월급은 난카이가 제일 좋았음. [[오사카 구장]]에 가보면 노무라 카츠야를 비롯한 주력들은 모두 외제차를 보유했으나. 킨테츠는 겨우 [[토요타 코로나]]를 탔다. >- 카도타 : 그렇지 않다. 아킬레스 건 부상을 입었을 때 고치 캠프에 들 것이 없어서 문짝에 실려 옮겨졌다. 그런 환경에서 야구를 하던 팀이었으니 구단이 돈이 많다고는 생각이 안 된다. >- 카도타 : 센트럴리그와 격차는 분명히 있다. TV중계도 없고, 신문기사에 실리는 것은 경기결과 뿐. >- 요네다 : 퍼시픽리그는 화제 만들기에 필사적이었다. [[후쿠모토 유타카]]와 말을 경주하는 이벤트까지 할 정도 였다. >- 카도타 : 퍼시픽리그의 구장들은 더러웠다. 난카이 2군 구장은 특히 프로가 사용할 구장이 아니었다. 2군으로 강등되면 한시라도 빨리 탈출하고 싶었다. >- 스즈키 : 킨테츠의 경우 [[후지이데라 구장]], [[일본생명 구장]]을 썼는데 특히 일본생명 구장은 홈팀만 라커룸을 사용하고 있어 원정팀은 더러운 복도에 신문지를 깔고 옷을 갈아입곤 했다. 그게 미안했다. >- 요네다 : 오사카 구장과 일본생명 구장은 너무 좁았다. >- 카도타 : 오사카 구장과 일본생명 구장 모두 절구 모양으로 생겨서 좁고 야유가 잘 들렸다. [[한큐 니시노미야 구장]]은 반대로 넓고 [[다카라즈카 가극단]]이 있어서 있는지 야유도 상냥했다. >- 요네다 : 벤치의 목소리보다 스탠드의 조롱이 더 컸다. >- 카도타 : 모두 전철회사 구단들이라 오너들끼리 경쟁은 대단했다. >- 스즈키 : 킨테츠의 천황이라고 불렀다. 킨테츠 오너는 간사이 지방에서는 중진이고 어디보다도 윗자리에 앉는다. 근데 팀 성적이 좋지 않아서 그게 굴욕이었고 "올해야말로"를 연발하셨다. 노력해야겠다 생각했다. >- 요네다 : 전철회사 구단에서 뛰어서 좋은 건 사원증을 이용해 마음껏 전철을 탈 수 있다는 것. 경기 때 늘 기차로 이동했다. 그리고 다카라즈카 가극단과 신년회를 함께 해서 그것이 인연으로 3명의 선배가 단원들과 결혼했다. 한큐에서 자랑할 수 있는건 이정도? >- 스즈키 : 한큐가 매각됐을 때 사철회사가 구단을 가지는 시대는 끝났다. 옛 시대의 종언이었다. >- 카도타 : 오사카 구장 그라운드에 주택 전시장을 만들었을 때는 슬펐고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